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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적

사소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원작에 나온 아카시의 집에 대한 오리지널 설정이 포함됩니다.
 *아카시 가족에 대한 오리지널 설정이 포함됩니다.

 오늘의 후리하타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용기와 명예, 욕망과 희망... 간추려 말해 모든 힘을 뱃속 밑바닥에서부터 끌어 모아야 했다. 오늘은 아카시의 아버지,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아는 아카시보다 더 ‘아카시’라는 이름으로 그려지는 남자, 아카시 마사오미를 만나는 날이었다. 후리하타는 아카시 아버지의 준엄한 얼굴을 떠올려보고는 소스라쳤다. 후리하타 역시 온갖 뉴스와 신문에서 많이 보아, 며칠 전의 대면이 아니었어도 길을 가다가 마주치면 바로 알아보았을 얼굴이었지만, 그것과 이렇게 약속을 정해 만나는 것, 그것도 아카시 마사오미의 집에서, 심지어 그의 아들의 애인으로서 만나는 것은 아주 다른 의미였다.
 후리하타는 이런 어마어마한 사정이 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을 꺼낸 아카시가 조금 얄미웠다. 물론 진지하고 엄숙한 어조로 아버지가 너를 보고 싶어 하신다고 말했다 해도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약간이라도 길었을 테니 말이다.
 후리하타는 거울을 보며 넥타이와 와이셔츠 칼라가 비뚤어지거나 구겨지지 않았는지 한 번 더 점검하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기 전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라인으로 들어가자 대학 동아리 동기 단체방에 스무 개, 가족 단체 라인방에 네 개, 고등학교 농구부 단체방에 열두 개의 메시지가 와 있다고 알림이 와 있었다. 후리하타는 그것을 모두 무시하고 그 아래의, 이미 확인된 라인창을 눌렀다. 아카시 세이쥬로. 그 이름 옆에 적힌 문장은 분명 기본 폰트로 적힌 문자인데도 익히 아는 그의 달필로 적힌 편지처럼 보였다.  
 우리 집에 오겠어?
 단 한 번도 거절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
 
 아카시가 후리하타를 처음으로 그 집으로 데려간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여름이었다. 하복으로 갈아 입은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극성맞게 더웠다. 후리하타는 그해 여름의 온도를 숫자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전철을 나서자마자 찡하고 더위가 정수리에 꽂힌 것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철에서 내내 무릎에 교과서를 펴고 공부를 하느라 다른 기억이 흐릿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철을 타고 있을 때 창밖의 풍경이나 전철이 움직이는 감각이 아니라 다른 일에 집중한 것은 그해가 유일했다.
 후리하타의 부모는 인터하이 이후로는 농구부를 은퇴하기를 원했다. 후리하타는 윈터컵까지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 휴대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꿔달라고 한 이후로 첫 부탁이었다. 부모는 후리하타의 형이 오토바이를 사고 싶다고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기를 걸었다. 이번 기말고사 결과가 일정 이상의 점수를 내면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후리하타는 쉬는시간, 점심시간에는 물론이고 매일 동아리 연습을 다녀와서도 졸리면 서 있고 코 아래 치약을 바르는 등 인터넷에 떠도는 온갖 잠 깨는 방법을 시도하며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 공부했다.
 후리하타가 그토록 간절했던 이유는, 물론 농구를 그만두고 싶지 않은 것이 첫 번째였으나, 한 가지 더 있었다. 부모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유였다. 아카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쿠로코가 단짝이라고 놀랄 정도로 친한 친구로서 지내고 있었지만, 후리하타가 생각하기에 고등학교 졸업을 기점으로 아카시와 서서히 멀어질 것은 명백했다. 대학에 진학하면 아카시는 정해진 길을 갈 것이고, 거기에 후리하타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애초에 지금도 자신과 그의 연결고리라고는 농구밖에 없었다. 후리하타는 가능한 마지막까지 아카시와 가까이 있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농구를 해야 했다.  
 그렇게 기말고사와 인터하이 준비에 헐떡이는 중에, 아카시의 전화가 왔다. 시험기간이나 농구시합 스케줄이 걸리지 않는 한, 아카시와의 통화는 꽤 자주 이루어졌다. 후리하타는 놀라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정작 낯선 것은 그 내용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우리 집에 오겠어?"
 후리하타는 잠시 이것이 아카시가 맞나 싶어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다시 확인해보았을 지경이었다. 물론 후리하타는 많은 친구들의 집에 놀러갔다. 카가미 집에서는 여러 번 묵기도 했다. 그러나 아카시의 집이라니. 다른 친구들과는 무게부터가 달랐다. 난이도든 희귀성이든 그랬다. 후리하타가 알기로 중학교 동창들 중 누구도 아카시의 본가에 간 적은 없었다. 딱 한 번 합숙으로 다 같이 별장 중 한 곳에 머물렀다고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친분관계라고 해서 아카시 집에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었다. 도대체 어떤 의도인지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았다. 후리하타는 약간 망설이다가, 첫 대답으로 질문을 택했다.
 "왜?"
 "이유가 필요해?"
 거절을 할 리 없다는 것을 가정한 뉘앙스였다. 후리하타는 반박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지는 못했다.
 "그, 그냥, 갑자기 놀러오라고 해서. 여태까지는 그런 적 없었잖아..."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아카시의 즉답에 반해 후리하타는 다시 한 번 대답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카시가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아카시와 1년 반 남짓 알아왔지만 여태까지 같은 말을 했던 사람은 항상 자신이었다.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또래들이 겪었을 법한 일을 경험해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곳으로 아카시를 안내했었다. 놀이공원에서 종일 놀고 나서 해질녘 관람차에서 주위를 내려다보는 나른한 뿌듯함도, 게임센터 인형 뽑기 기계에서 마침내 인형을 뽑아서 안는 즐거움도, 영화관에서 팝콘을 한 움큼 쥐어 입에 털어 넣어 먹는 맛도, 스케이트장에 막 들어서 빙판에서 어색하게 움직이는 느낌도... 모두 후리하타가 아카시에게 겪게 해주고 싶던 것이었다. 아카시는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자신 쪽에서 먼저 무엇을 하자고 제안을 꺼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니, 도대체 무슨 작정일까. 게다가 궁금증을 차치하고도,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아카시와 만나려면 주말 하루를 온전히 비워야 했다. 물론 아카시와 종일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꿈만 같았으나, 가뜩이나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데 하루라도 공부를 놓았다가 2학기부터 아예 아카시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후리하타로서는 기말고사를 망쳤을 경우 부모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머릿속을 휘몰아치는 생각들을 정리하기 이전에, 사실은 아카시가 그 말을 한 순간부터 후리하타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알았어. 갈게.”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각오가 무안할 만큼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그날은 유감스럽지만 내가 일이 있어서, 집에서 바로 만나야 할 것 같아. 주소를 보낼 테니 이곳으로 오면 돼."
전화를 마치고 얼마 안 되어 아카시는 라인으로 어떤 주소를 보내왔다. 아카시가 지정한 장소는 도쿄 도내가 아니었다. 후리하타는 별장 중 한 곳이라고 짐작하고 약간 실망했다가, 부끄러워 스스로를 다그쳤다. 이렇게 스스럼없이 만나는 사이가 된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자신이 아카시에게 무슨 특별한 사람이기를 욕심내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약속일을 비우기 위해 후리하타는 매일 조금씩 취침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했지만, 토요일치 공부를 모두 해치우지는 못했다. 결국 1시간 여 전철을 타고 가는 동안 후리하타는 책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바깥에 대한 생각을 잊었고, 전철을 나가자마자 생각보다도 후덥지근한 공기가 그의 피부에 달라붙었다. 후리하타는 역내 편의점에서 물을 살까 하다가 그냥 집으로 바로 가기로 했다. 아카시가 보내준 주소를 지도앱에 붙여 넣어보니 역에서 도보로 10분 남짓이었다. 조금만 참으면 아카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위나 목마름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역 밖에는 고층건물이라고는 없어서,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면 지평선이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후리하타는 그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아카시의 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집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이층저택으로, 후리하타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집들 중에 가장 크고 높았다. 그 집을 발견하자 어쩐지 후리하타는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낡은 단층주택과 그만큼 오래되어 넓고 높은 나무들이 늘어선 낮은 골목길을 돌아가자 이내 목적지가 나왔다. 벽돌집의 뒷면은 기다란 유리창이 늘어서 있었는데, 모두 흰 커튼이 반 정도 드리워져 있어서 안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해질녘이면 어느 창문에서인가 유령이라도 나올 분위기였다. 후리하타가 은근한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집의 뒤뜰에 수국이 가득 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원예전문가가 관리하고 있을, 풍성하고 잘 가꿔진 수국이었다. 수국 뿐 아니라 정원의 나뭇잎 하나까지도 철저히 관리되고 있는 듯해서 유령이 산다고 하기에는 인적이 뚜렷했다. 일단 두려움에서 벗어나니 본래 목적이 떠올랐다. 저 집에서 아카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후리하타는 정문으로 가는 걸음을 바삐했다.
 현관 입구에서 다소 망설이기는 했지만, 후리하타가 그나마 오랜 시간 들이지 않고 초인종을 누를 수 있었던 것은 아카시 가문의 일원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카시 가문 정도 되면 별장이라도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가 기대한 것은 수국을 관리한 정원사였지만, 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사람은 아카시 가문의, 그것도 직계 후계자인 아카시 세이쥬로였다.
 “어, 아카시?”
 “왜 그렇게 놀라?”
 “아카시가 나올 줄 몰라서...”
 아카시는 신기한 소리를 한다는 듯 후리하타를 쳐다보았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나오겠어.”
 지극히 당연하다는 말투에 후리하타가 할 말을 잃은 사이, 아카시는 문을 좀 더 열고 들어오라 재촉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냉방기가 작동되고 있는지 후리하타의 온몸을 흠뻑 적셨던 더위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러나 후리하타는 걸어올 때보다 훨씬 덥다고 느꼈다. 신발을 벗고 아카시가 중문을 열 때, 잠깐 그의 팔꿈치가 후리하타의 팔뚝에 닿았다.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여름에도 냉랭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미지근한, 자신과 비슷한 온도였다. 단단하고 뜨듯한 무언가가 아카시의 팔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후리하타는 아카시와 닿은 부분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어서 들어오라고 소리 내어 말할 때까지 중문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실내는 전체적으로 짙은 나무색으로 마감되어 있어 시원해 보인다는 것이 후리하타의 첫 인상이었다. 겨울에는 따뜻해 보일 것 같았다. 무겁게 늘어뜨려진 샹들리에부터 복잡한 무늬를 한 카펫, 오른쪽으로 난 2층 계단참에 세워진 정교한 조각상 등,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후리하타는 서양 왕족 특별 전시회라도 온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에 깊이 빠지지 않은 까닭은 집 안의 물건들 역시 정원과 마찬가지로, 주기적으로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후리하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여기는 누가 살아? 아, 별장이면 평소에 사는 사람은 없으려나... 누가 관리하는 거야? 가끔 오기엔 아쉽다. 정말 멋있는데.”
후리하타가 떠오르는 대로 말하다가 아카시를 쳐다보자, 그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선 이 집에 대해 호의적인 평을 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곳은 별장이 아니야. 그렇다고 현재 누군가 거주하는 곳도 아니고. 간간이 찾아와서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있지만 말이야.”
 아카시가 곧장 말을 이어, 후리하타는 별장도 누가 사는 집도 아니라면 어떤 집인지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는 어머니의 집이거든.”
 그 말을 듣자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이유가 더욱 아리송해졌다. 후리하타도 아카시의 어머니가 병환으로 그의 어린 시절 사망했던 것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집에, 그것도 지금은 아무도 없는 집에 자신을 초대해서 아카시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카시는 후리하타 자신의 생각쯤이야 바로 읽어낼 수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소개해드리고 싶어서.”
 “...여기 어머니의 무덤이라도 있는 거야?”
 이번에는 아카시도 후리하타의 말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깐 멍하니 그를 보더니 작게 웃었다. 불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마. 일단 둘러보자.”
 아카시는 후리하타를 이끌고 1층의 거실과 응접실, 손님용 침실, 서재, 식당과 부엌을 차례로 안내했다. 하나같이 아카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꾸며져 있었다. 후리하타가 특히 감탄한 것은 식탁이었다. 직사각형 형태의 식탁은 세이린 농구부 모두가 앉아도 남을 정도로 널찍했다.
 “사람이 많았나봐.”
 아카시는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이렇게 식탁이 크고, 의자도 많잖아.”
 “여기에서 식사하는 사람은 어머니와 나뿐이었어. 아버지는 가끔 찾아오셨지. 아주 가끔 파티가 열렸고.”
 이번에도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의문을 바로 풀어주었으나, 역시 후리하타의 입장에서 명쾌하게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아카시의 아버지는 평소에는 어디에서 살았던 거지? 아카시가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라 후리하타는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카시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카시는 식당을 나서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설명을 이어갔다.
 “엄밀히 말해 이 집은 외가의 소유야. 지금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것도 그쪽이지. 원래 우리 가족이 사는 집은 도쿄에 있었어. 지금 내가 사는 곳이기도 해. 어머니는 요양 차 이곳에 머무르신 것이었고, 아버지는 다망하신 분이라 대부분 도쿄 집에 계셨어.”
 답은 들었으나 아카시가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조차 후리하타의 의문을 증폭시켰다. 아카시는 자신의 집에 대해 왜 이렇게 내게 자세히 알려주는 것일까. 그가 본인의 주변 환경에 대해 침묵한다는 사실은 후리하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하고 운을 뗐을 때 아카시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던 것이 신경 쓰였다. 후리하타가 얼마 안 되게 자신 있어 하는 일은 타인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계단이 끝났다.
 계단을 다 오르자 간이 응접실로 쓸 수 있을 법한, 소파가 있는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 공간을 중심으로 문이 세 개 있었다. 아카시는 왼쪽 문부터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내 방, 여기가 어머니 방, 여기는 다실 겸 휴게실이야. 마지막 방만 화풍*으로 만들어졌어.”
 “와, 그럼 아카시가 어릴 때 살던 곳이야?”
 아카시의 방이라고 소개된 방문을 열자마자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어떤 말을 빠트렸는지 깨달았다. 아카시에게 실수를 찾아내게 되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지만 전혀 뿌듯하지 않았다. 아카시가 이 방을 소개할 때에는 ‘내 방이었던 방’이 적확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 의미 없는 창고. 그게 아니라면 이런 분위기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방은 가구의 품격과 상관없이 삭막했다. 후리하타는 그림이 걸려 있고 생화가 꽂혀 있어도 이렇게 살풍경해보일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창밖에 바로 아름드리나무가 있어 지척에서 초록 잎사귀가 보였음에도, 모든 것이 박제된 것 같았다. 침구나 책상 등은 당장 사용해도 무리 없을 만큼 깨끗했으나, 아카시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고작해야 아주 고상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가 방에서 전해지는 정보였다. 이 방만 보면 나이조차 비슷하게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책장에는 어려운 책들이 꽂혀 있었기에 더 그랬다. 후리하타는 이 책을 읽던 아카시와 동갑일 적은커녕 대학생이 되어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은 제목들이었다.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애매한 표정을 보았는지 의아한 얼굴이었다.
 “어디 불편한 부분이라도 있어?”
 “아, 아니... 그냥 아카시 방은 본가도 비슷한 모습일까 궁금해서...”
 아카시라면 자신의 생각을 다 파악한다 해도 놀랍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이런 말을 솔직하게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아카시는 잠깐 생각하는 눈치였다.  
 “방의 구조나 가구 배치 같은 부분을 의미하는 거라면 물론 차이가 있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방에 요구하는 것은 비슷하기 마련이니. 그런 면에서는 기숙사 방도 마찬가지야. ...후리하타는 그렇지 않나?”
자신에게 질문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후리하타는 당황하면서 말했다.
 “어, 나도 크게 다를 건 없긴 하지만...”
그래도 NBA 포스터나, 월간농구나, 열차 모형이나 산리오 신칸센 시리즈 같은 건 있어. 후리하타는 그 말을 꾹 눌렀다. 생각해보면 아카시 같은 재벌은 방도 자신처럼 평범한 집과는  다른 게 당연했다. 아카시 방 뿐 아니라 다른 방들도 다 그럴지도 몰랐다. 어머니의 방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카시의 방을 나가서 옆방 문을 열자, 후리하타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방은 방의 주인이 방금 전 외출을 나간 것처럼 훈기가 돌았다. 아이보리색과 연보라색을 기조로 꾸며진 어머니의 방은 여름날 햇빛을 가득 받아 유난히 반짝거렸다. 흰 침대보가 덮인 중앙의 커다란 침대 덕에, 방은 실제보다도 더 넓어보였다. 전면의 넓은 창은 밖에서 본 예상대로 지평선까지 탁 트여 있었다. 후리하타가 창문 앞에 서자 멀찍이 바다가 보였다.
 “매일 창밖만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아.”
 아카시는 후리하타 옆으로 다가왔다.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오늘 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도 자주 창밖을 내다보셨어.”
 살아있는 사람의 방보다 죽은 사람의 방이 더 생기 넘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후리하타는 금방 납득했다. 가구가 창을 가리지 않도록 배치되어 있어, 방 어느 곳에서도 창밖을 볼 수 있었다. 후리하타는 책장에서 그녀가 영미문학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테이블에서 그녀가 체스를 즐긴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후리하타 자신이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었더라면 벽에 걸린 그림들로 그녀가 좋아하는 화풍도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침대 옆의 협탁에는 가족사진이 여러 점 놓여 있었다. 아버지까지 함께 찍은 사진이 몇 장 있기는 했으나 대다수가 어머니와 아카시 둘이 피사체였다. 어떤 사진에서도 어머니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조그만 아카시를 보면서, 후리하타는 새삼스럽게 그녀가 아카시의 어머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카시가 자신을 어머니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집을 거의 둘러본 지금도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후리하타는 알 수 없었다. 아카시는 집에 관한 설명은 했으나, 그 설명이 자신을 이 집으로 부른 목적을 뒷받침해주지는 않았다. 후리하타는 뒤돌아보았다. 아카시는 팔짱을 끼고 후리하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카시, 어머니께 소개한다는 건...”
 아카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하고 있잖아.”
 초대한 본인이 그렇다고 하는 데야 더 할 말 없었지만, 이것이 아카시의 어머니에게 소개를 하고 있는 과정이라면 자신도 뭔가 하고 싶었다. 어머니의 묘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아카시에게 데려다달라고 할 수도 없었거니와, 그럴 의도였다면 애초에 아카시가 그곳으로 약속장소를 정했을 것이다. 사진을 보고 인사하자니 아카시의 아버지가 있어서 부끄러웠다. 후리하타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방을 나가기 전 허공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저는 후리하타 코우키라고 합니다! 아카시의 친구예요! 잘 부탁드려요!”
 무언가 반응이 올 줄 몰랐는데 큰 반응이 있었다. 상대가 인사를 한 대상이 아니었을 뿐이다. 큰 웃음소리가 들려 옆을 보자, 아카시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폭소하고 있었다. 후리하타가 아카시를 알아온 중에 가장 큰 웃음이었다. 그가 이렇게 웃었던 적이 언제였지? 아니, 있기는 했었나? 자신이 뭘 잘못했나 싶어 후리하타가 황당하게 그를 쳐다보자, 아카시는 겨우 웃음을 멈췄다. 그는 억지로 표정을 굳혔지만,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머니도 너를 반기실 거야.”
 그것이 후리하타의 첫 방문이었다.

 첫 방문 후 몇 년간 후리하타가 그 집에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아카시와 후리하타가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후리하타는 기말고사에서 부모와 약속했던 성적을 받아냈고, 그의 목표대로 윈터컵까지 아카시와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후리하타의 생각처럼 농구만이 아카시와의 연결고리는 아니었다. 각자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아카시는 자연스럽게, 오히려 교토에 살던 때보다 자주 연락을 해왔다. 만남도 잦아졌다. 그들이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후리하타는 잠정적 작별을 대학교 졸업까지로 미뤄둘 수 있었다.
 대학교 첫 학기가 지나고 어느 정도 학교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그즈음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자취방 근처의 고층 맨션에 집을 구했다. 두 사람의 학교가 비교적 가까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후리하타는 생각했다. 이유가 어찌됐든 기쁜 일이었다.
 아카시는 온갖 이유를 붙여 일주일에 너덧 번은 후리하타의 집에 왔다. 후리하타가 보기에도 이곳에 오려고 꾸며낸 이유였다. 아카시라면 자신의 몇 배로 바쁠 텐데, 도피든 뭐든 후리하타로서는 아카시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늦가을의 그날도 후리하타는 뒤뜰 낙엽을 쓸고 있었다. 그가 사는 작은 공동주택은 거주민이 구역을 나누어 공동구역 청소를 하게 되어 있었다. 아카시가 방에서 기다리는 동안 청소 마무리를 하고 저녁식사를 하면 시간이 맞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빗자루를 들었다. 후리하타는 아무리 아카시라도 비질은 서툴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의외로 익숙한 몸짓으로 낙엽을 모았다.
 “솔직히 아카시가 이런 걸 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아카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쓰레받기에 모인 낙엽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어머니와 함께 해본 적 있어.”
그 말을 듣자 후리하타는 아카시와 그 집에 간 다음부터 준비해두고 있던 물건을 꺼낼 때가 왔다고 결심했다. 벌써 계절을 한 바퀴 돌고도 남았지만, 어떤 구실로 줘야 할지 몰라 서랍장 안에 숨겨두었던 물건이었다. 후리하타는 아카시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저번에 가봤던 집에서?”아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사의 업무였지만 어머니가 나와 함께 경험해보고 싶다고 하셨거든.”
 “혹시... 그 집에 한 번 더 가 봐도 돼?”
 “낙엽청소라도 할 셈이야?”
 아카시는 어디까지나 농담으로 한 말 같았으나, 후리하타에게는 그럴싸한 변명으로 들렸다. 후리하타는 다소 빠르고 크게 말했다.
 “응, 맞아, 아카시의 집을 같이 청소하고 싶어.”
 아카시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지만, 거절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후리하타의 걱정이 무색하게, 빗자루를 건물 벽에 세워놓더니 바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면 갈까?”
 “어, 지금?”
 이렇게 빠른 진행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후리하타는 약간 당황했지만, 싫을 리 없었다.  
 “어차피 같이 저녁식사를 하려고 온 것이었으니까. 그 근처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어.”
 후리하타는 잠깐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 방에서 준비한 물건을 꺼내 가방에 넣었다. 아카시도 자신이 청소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이왕에 속아주었으니 만큼,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시의 차를 타고 도착한 그 집은 정원의 색깔을 제외하고는 예전에 방문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최근에도 관리인이 정비를 하고 간 것 같았다. 뒤뜰의 낙엽조차 거의 없었다.
 “청소기 어디 있어?”
 후리하타는 말해놓고 아카시가 이런 것을 알 리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답이 돌아왔다.
 “집 밖의 창고에 있을 거야. 관리인이 잡동사니는 그곳에 둬.”
 “아카시는 이 집에 대해서 잘 아네.”
 후리하타는 자신의 말이 약간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덧붙였다.
 “오래 산 게 아니라고 해서.”
 아카시의 대답은 후리하타가 가져온 물건을 꼭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한층 확고하게 만들었다.
 “어머니와 가끔 술래잡기를 했거든. 창고에도 숨었던 적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어.”
 집 바깥의 단층 건물은 정원 나무숲에 숨겨져 있어서, 후리하타가 처음에 왔을 때는 발견하지 못한 곳이었다. 문을 열자 아카시의 말대로 청소도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후리하타는 청소기와 빗자루, 걸레를 꺼냈지만, 그것들을 들고 집에 들어가면서도 별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후리하타는 애써 먼지 한 톨을 찾아내 털고 완벽하게 정리된 러너*의 각도를 괜히 조금 바꿔보면서, 어린 아카시가 어머니를 피해 어디에 숨어 있었을지를 상상했다. 식탁 밑, 소파 뒤, 옷장 속... 숨을 곳은 무궁무진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카시의 이름을 부르며 온 집안을 돌아다녔을 것이고 아카시는 한껏 숨을 죽이고 있다가 어머니가 자신이 숨은 곳을 지나치면 안심해서 작게 웃었을 것이다. 세이쥬로, 세이쥬로. 후리하타는 그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아 생각을 멈췄다.
 청소거리는 없어도 집이 커서, 청소를 끝내자 사위가 어스름해져 있었다.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주차장으로 향하려던 것을 막아섰다.
 “자, 잠깐만.”
 “여기서 더 할 일이 있어? 곧 레스토랑을 예약해둔 시간이야.”
 후리하타는 허둥지둥 가방에서 물건을 꺼냈다. 원래는 청소를 하다가 주려고 했는데, 집을 돌아다니던 어린 아카시를 생각하느라 잠깐 잊고 말았다. 후리하타는 아카시에게 농구공 쿠션을 들이밀었다. 실제 크기와 똑같은, 침대에 두는 쿠션이었다. 아카시는 일단 받아들기는 했으나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후리하타는 이 쿠션을 사고 셀 수 없이 연습했던 말을 읊었다.
 “저번에 왔을 때 아카시 방에 농구 관련된 물건이 하나도 없어서 사봤어. 어머니와 농구를 했다고 들었는데, 농구공 모형이라도 하나쯤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럼 여기 올 때마다 생각날 것 아냐. 어, 어머니도 기뻐하실 것 같고 해서 가져온 거야. 혹시 사라졌거나 잃어버린 거라면 아쉬울 것 같아서. 아카시가 괜찮다면, 여기의 아카시 방에 뒀으면 좋겠어. 피, 필요 없으면 돌려주고.”
 살 때만 해도 실제 농구공과 비슷하다 생각했는데, 정작 아카시가 한손에 농구공 쿠션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자 영 어울리지 않았다. 아카시는 쿠션에서 후리하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렇게 마음 써준 건 고마워. 하지만 이곳에 내 개인 물건이 별로 없는 이유는 거의 도쿄의 집으로 가져갔기 때문이야. 어머니와 농구 연습을 할 때 사용했던 농구공이나 연습복 같은 것도 지금 내 방에 보관되어 있어.”
 그 방은 단순히 물건을 다른 곳에 옮겨서 아카시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후리하타가 지레짐작한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지는데, 아카시가 더욱 깊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후리하타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 까닭이기도 했다.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아카시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쿠션을 두고 가면 시간이 지날 것 같은데...”
후리하타는 자신이 쿠션을 들고 돌아가서 다음에 주겠다고 말하려 했으나, 그 생각은 예약시간을 바꿔도 되겠지만, 하는 아카시의 서두에 꺼내지도 못했다.
 “아니면 이 집에서 만들어 먹을까?”
 “응! 정말? 그래도 돼?”
 너무 즉답한 것 같아서 민망했지만, 아카시는 그 부분을 지적하는 대신 혼잣말처럼 말했다.
 “미리 연락해두면 관리인이 식재료를 준비해두지만 오늘은 냉장고에 아무 것도 없을 것 같고... 대신 전철역 근처에 식료품점이 있을 거야. 네가 좋다면 같이 사서 만들자.”
 후리하타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지난 생일을 다시 맞은 기분이었다.
 청소는 매 계절마다 한 번씩 이어졌다. 대학교를 졸업하는 해가 되자 후리하타는 혼자서도 집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찾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준 쿠션이 아카시의 침대에 놓여 있는 것을 볼 때마다, 후리하타는 누구에게든 감사하다는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그 해 여름에도 수국이 가득 피어 있었다. 후리하타는 호스를 끌어와 수국에 물을 주다가, 수국 옆의 빈 공간을 보고 문득 입을 열었다.
 “아카시, 우리도 여기 뭔가 심으면 안 돼?”
 쿠션 때처럼 고민하다 겨우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후리하타는 아카시에게 쉽게 부탁하는 법을 익혔다. 아카시는 약간 놀란 표정이었지만, 옆에서 다른 호스로 물을 주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거야?”
 “그러면 우리가 없을 때도 이 집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
 후리하타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아카시가 자신의 말을 비웃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카시는 집 주위의 길을 따라 벚나무 터널을 만들고 싶어 했으나, 우리의 힘으로 하자는 후리하타의 말에, 수국 옆에 한 그루만 심기로 결정했다. 그 작업은 당장 그 주 주말에 진행되었다. 가져온 벚나무 묘목을 한편에 두고 함께 삽으로 흙을 파다가, 이번에는 아카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나무가 첫 꽃을 피우면 할 말이 있어.”
 그러나 아카시는 이유가 뭐냐는 후리하타의 질문에 답을 주지는 않았다.
 몇 년이 지나 나무가 첫 꽃을 피울 계절이 되자, 후리하타는 그 집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말이 무엇인지 봄이 올 때마다 온갖 가정을 해보느라, 이제는 아카시가 “나는 사실 외계인이야.”라고 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아카시의 말은 후리하타가 생각하지 못한 단 한 마디였다.
 그 집에 가기로 한 날 아침부터 아카시는 다소 들떠보였다. 운전하면서는 후리하타가 과속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마침내 두 사람이 그 집에 도착해 벚나무가 보이자마자,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손을 잡고 벚나무 아래로 빠르게 걸었다. 그리고는 앞장선 아카시의 머리가 채 나뭇가지 아래로 들어가기도 전에 그는 후리하타를 향해 돌아섰다.
 “좋아해.”
 아카시의 머리가 나뭇가지에 가릴 즈음 후리하타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고, 자신의 머리까지 벚나무 그늘에 들어가자 울기 시작했다.
그날 집안에서 후리하타는 ‘친구’와 ‘아카시’라는 단어만 바꾸어 첫 날의 외침을 반복해서 또 한 번 아카시를 폭소하게 만들었다. ‘세이쥬로’라는 말을 하는 데 말을 더듬었던 탓에 아카시의 웃음은 더 커졌다. 벚나무 아래에서 약속하기는 했으나 바로 이름을 부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리하타는 쑥스러워하며 아카시의 이름을 부르다가, 이름을 부르지 못했던 두 번째 방문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카시 쪽이, 비록 소리친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나의 연인인 코우키를 소개하려고 왔다고.
후리하타가 아카시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된 후에도 둘은 꾸준히 그 집을 방문했다. 이제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그의 재력을 감안하더라도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큰 집을 구입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일부러 후리하타의 집 근처에 집을 구하던 시절부터, 아니 그가 처음 어머니에게 자신을 소개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아카시가 자신과 동일한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후리하타는 더 이상 이별의 상한선을 두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겨울이면 그 집을 특히 자주 찾았다. 후리하타가 빈 뒤뜰이 쓸쓸해 보인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카시의 예전 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침대는 어린이용치고는 컸지만, 성인 두 사람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 누우려면 서로를 꽉 끌어안고 최대한 웅크려야 했다. 쿠션 하나 둘 곳이 없어 헤드보드에 밀어두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후리하타는 한 순간도 불편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고, 아카시 역시 그럴 것이라 믿었다.
 그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아카시가 벽난로의 불이 꺼졌는지 확인하는 동안 후리하타는 먼저 중문을 열었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후리하타는 얼굴을 보자마자 그 이름을 먼저 떠올렸다. 수많은 뉴스와 신문에서 본 얼굴, 아카시 마사오미였다. 사진보다 실제가 조금 더 잘생겼고, 아카시와 훨씬 더 닮아 보인다고 멍하니 생각하다가, 가까스로 그가 왜 여기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아카시의 아버지이므로  마땅히 이곳에 올 수 있었다. 자신보다 더. 후리하타는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보기 전에 크게 허리를 굽혔다.  
 “아, 안녕하세요! 후, 후, 후, 후리하타 코우키라고 합니다.”
 어깨에 큰 손이 얹히는가 싶더니 후리하타를 일으켜 세웠다.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후리하타가 기겁해서 팔을 떼려 하자, 아카시는 더 세게 허리를 안았다. 아카시 마사오미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해지는 것을 보자 후리하타는 한겨울임에도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제 연인입니다.”
 아카시는 굳이 덧붙였다.
 “알고 계시다시피.”

 *

 그리고 드디어 오늘이었다. 우리 집에 놀러오라는 아카시의 말이 지정한 날짜. 후리하타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옷차림을 다시 점검한다는 둥하며 수선을 피웠다.
 “세이쥬로, 나 이상하지 않아? 머리 안 뻗쳤지? 옷에는 뭐 묻은 거 없어?”
 아카시는 기가 막힌다는 듯 후리하타를 쳐다보았다.
 “프로포즈했을 때보다 더 긴장하는 것 같은데.”
 “당연하잖아! 아카시 아버지인데!”
 아카시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걱정하는 전부 괜찮아. 그리고 내 아버지가 어떻게 보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그, 그거야, 인정받고 싶으니까...”
 당사자가 아닌 아카시에게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후리하타가 빠르게 자학에 빠지는 사이,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왼손을 꽉 깍지 꼈다. 함께 약지에 낀 반지가 아파 후리하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카시가 알려준, 아카시의 아버지가 지정한 장소는 아카시 어머니의 집이었다. 후리하타는 이제 부모의 집만큼 들락거리던 곳인데도 낯선 외국의 집에 가는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문 앞의 주차장에는 처음 보는 차가 있었고,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두 사람이 다가와 운전석과 조수석 문을 열었다. 집에 들어서자 자신을 아카시 마사오미의 비서라고 밝힌 남자가 후리하타를 2층으로 인도했다. 후리하타는 안내되는 방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손을 잡아주고 있는 아카시가 있지 않았더라면, 현관에 들어가기 전부터 배탈이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카시의 아버지는 다실에 있었다. 양복을 입고 있었으나 그게 맞지 않다는 생각이 죄스러울 정도로 분위기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후리하타가 좌상 건너편에 앉을 때까지 그는 인사도 받지 않았다. 아카시의 인사도 마찬가지였다. 좌상에 놓인 차를 한 잔 마신 후, 아카시 마사오미는 이전의 만남은 완전히 없었던 것처럼 물었다.  
 “자네가 후리하타 코우키 군인가.”
 “네, 그렇습니다.”
 후리하타는 목소리 끄트머리가 조금 떨리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지만 우려했던 것보다는 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후리하타의 옆에 앉은 아카시가 뭐라 말을 하려고 하자, 그의 아버지는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이 집에는 언제부터 왔지?”
 “고, 고등학교 3학년 여름부터요...”
 “왜 오자고 하던가?”
 후리하타는 이 말을 해도 될까 싶어 아카시의 눈치를 보았다. 아카시는 허락한다는 듯 눈짓했다.
 “어머니에게 소개해주고 싶다고요...”
 아카시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쳐다보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표정까지는 무서워서 살펴보지 못했다. 애초에 후리하타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엄격하던 그의 목소리가 한층 매서워졌다.  
 “네 소유가 아닌 집에 주인의 허락 없이 객을 들이는 건 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하물며 이 집은 아카시 가문의 것도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런데 네 멋대로 외부인을 데려왔다는 건가?”
 후리하타는 목소리만 들어도 어깨가 움츠러들 것 같았는데 아카시는 그의 아버지에게 맞서듯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외가에서 제게 열쇠를 주었으니 그만한 소유권은 부여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집기는 어느 것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코우키가 말했듯, 어디까지나 어머니께 소개해주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그들이 이 집에서 취침까지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카시는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후리하타는 그 사실을 밝힐 자신이 없었다. 무릎을 내려다보며 두 사람의 가시 돋친 말이 오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는데, 한 문장이 후리하타의 귀에 꽂혔다.
 “너와 저 남자의 감정의 교류 같은 것은 들을 가치가 없다. 정략결혼을 거부했으면 최소한 서로 얻을 것이 있는 관계여야지. 대체 네가 저 남자에게 얻을 게 뭐가 있 - ”
 후리하타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첫날, 그리고 아카시가 고백한 날 허공에 대고 했던 것보다도 큰 소리였다.
 “저, 저는, 아카시 세이쥬로 군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줄 수 없지만, 아카시가 원하는 게 제가 갖고 있는 거라면, 뭐든지 줄 수 있어요! 제, 제 목숨이라도요!”
 자신이 부르짖은 마지막 발음이 사라지자, 후리하타는 쉼 없이 말을 주고받던 두 아카시가 입을 다물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리하타는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침묵이 감도는 잠시간에 다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서가 다가와 아카시 아버지에게 짧은 말을 속삭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네. 먼저 일어나보지.”
 아카시의 아버지가 데려온 사람들은 모두 그를 따라 나가버렸다. 아카시와 후리하타는 떠나기 전 집을 한 바퀴 돌았다. 수국은 누런빛의 꽃대와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후리하타는 여러 번 본 광경임에도 더욱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늘은 특히나 그랬다. 아카시는 수국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더니, 대뜸 말을 꺼냈다.
 “수국은 어머니가 심자고 하신 거야. 당신의 인생에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후의 일이지.”
 이 얘기는 처음 들어보았다.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생각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사소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다고 하셨어. 향기 좋은 꽃, 새로 산 옷, 달콤한 케이크... 그게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는 것들 말이야. 하지만 그런 것들이 누구에게든 필요한 순간이 온다고 말씀하셨어. 그것이 어머니가 수국을 심으신 이유야.”
 아카시는 연극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후리하타가 그 시선을 쫓아가니 2층의 아카시 방을 향하고 있었다. 창문으로는 언뜻 반쯤 걷힌 커튼만 보였다.
 “너는 내게 쿠션을 주었지. 지금까지 그런 걸 내게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후리하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동의했다. 쿠션은 보이지 않았지만, 머릿속의 쿠션이 방금 전까지 본 아카시 마사오미의 얼굴에 덧씌워져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필요 없는 물건이기는 했어... 아카시 아버지의 말씀이 맞긴 하지...”
 “하지만 그건 정말 필요한 물건이었어.”
 후리하타는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하려 했으나 아카시가 같은 말로 운을 뗀 탓에 말 할 기회를 놓쳤다. 그가 말을 고치려는데 양 팔이 잡혔다. 고개를 들자 아카시가 후리하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카시에게 아주 드물게 보이는 흔들리는 촛불 같은 눈동자. 후리하타는 이 눈빛을 겪은 바 있었다. 프로포즈를 할 때, 그리고 고백을 할 때였다.
 “나는 네가 필요해.”
 후리하타는 자신이 벚나무 옆에만 오면 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이 울음을 멈추는 것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아카시는 후리하타를 달래다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가볍게 후리하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네 생명은 원하지 않으니 주지 않아도 돼.”
 후리하타는 훌쩍이며 팔꿈치로 아카시의 허리를 쳤다.
 “...그 얘긴 그만해. 더 울고 싶어지니까.”

 신입사원들이 입사하면서 후리하타의 자리도 바뀌었다. 후리하타는 바뀐 자리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창가를 등진 자리라, 낮에는 햇볕에 등이 데워져 따뜻했고 집중이 안 될 때에는 고개만 돌리면 벚나무가 눈에 들어와서 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을 조금 남겨두고 후리하타가 낮잠에 빠지려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귀찮은 몸짓으로 휴대폰을 들자 액정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나열되어 있었다. 후리하타는 별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가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수신자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무릎을 꿇어야만 할 것 같은 이 중후한 목소리는, 분명 아카시의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는 짧게 용건을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그 말은 후리하타가 오후 근무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 집에 찾아오게.”
 후리하타는 시계가 6시를 가리키자마자 동료들에게 인사도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그는 아카시에게 전화를 걸면서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화풍(和風): 일본식, 일본풍.
 *러너: 식탁, 장식장 등의 중앙에 길게 장식하는 용도의 인테리어 소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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