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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   해

비와 키스

 후리하타 코우키는 현실에 헌신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현실과 헌신이라는 단어의 무게에 비해, 그 실질적인 의미는 간단했다. 평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게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 그는 평범하다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가장 성취하기 힘들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것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기에, 그가 지금 하려는 짓은 그가 바라던 삶에 비해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타인의 집으로 자신이 보냈던 편지를 수거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것도 한 번도 방문해본 적이 없는 곳으로. 무모한 짓이었지만, 자신이 벌였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한 일은 이 길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후리하타 코우키는 아카시 세이쥬로와 사랑에 빠졌‘었’다. 과거형임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사랑을 현실로 끌어오기에는 용기가 조금 부족했던 탓이다. 사 년 전의 가을 이맘때쯤에, 후리하타는 뉴욕에서 학교를 다니던 형을 만나기 위해 뉴욕에 왔다. 후리하타가 뉴욕을 돌아다니던 중 갑자기 내리던 비를 피하다가 둘은 만났고, 첫눈에 반했고, 함께 밤을 보냈다. 그리고는 그렇게 사랑에 빠진 채로 며칠의 시간을 함께 보내다가 아무런 기약 없이 그대로 헤어졌다. 둘의 사이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비슷한 것을 찾자면 먼 곳에서 갑자기 재회한 알던 사람, 정도가 적합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들은 친구라고 말할 만큼의 접점조차 없었기에, 거의 생면부지의 사람과 사랑에 빠졌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후리하타는 ‘여행지에서의 뜨거운 사랑’이라는 영화의 단골 소재조차 즐기지 않던 편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설령 안다고 해도, 무언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엔 자신의 용기가 부족했다. 정말로, 그는 사랑을 현실로 끌어올 만한 용기가 없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들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 편지쓰기였다. 자신이 지내고 있는 도쿄의 날씨와, 그가 있을 뉴욕의 날씨를 예측하는 짧은 말들, 계절에 따라 바뀌는 거리의 모습들, 일상에 대한 짧은 언급들.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그것들을 딱히 그리워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자신이 전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용기의 범위 역시, 얼핏 들었던 주소를 기억에서 되살려 한 달에 한 번 정도 편지를 부치는 일밖에는 없었다. 답장을 바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긴 했으나, 처음 몇 달은 내심 답장을 기대하기도 했다. 자신이 겪었던 것이 꿈이 아니었다고 확실히 말해주기를 바랬다. 비록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시간들이 살아 움직였던 것만은 사실이었음을.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고, 몇 년의, 몇 십 통의 편지들을 통해 후리하타는 더 이상 그 기억이 실재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느꼈다. 이제 놓아줄 때가 된 것 같았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집은 뉴욕 한복판의 고급 아파트였다. 그 말은 외부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파트 단지 안까지는 어찌어찌 들어오기는 했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경비원은 방문자 신원이 확인되기 전까지 아파트 현관문을 개방해줄 수 없다고 했고, 후리하타는 약간 어설픈 영어로 구구절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잘못 보낸 편지가 있는데 반송을 기다릴 시간이 되지 않는다, 직접 찾아가야 한다며 더듬더듬 말하던 후리하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경비원은, 후리하타가 단념하고 돌아가려던 차에, 호수를 말해주면 우편물 상황을 확인해주겠다며 호의를 베풀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어 아카시의 집 호수를 말해주자, 경비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매번 오고 있는 우편물은 모두 집 주인이 꼬박꼬박 챙겨가고 있으며, 반송이 접수되었던 편지 역시 한 건도 없었다는 것이다. 후리하타가 아카시의 인상 착의를 설명하니, 경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 년 전 무렵부터 집주인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 저기 지금 나오네요.

 당황한 후리하타가 아파트 유리문 너머를 들여다보니, 아카시가 우편함을 확인하고 있었다. 단순히 기다리는 편지나 고지서 같은 것들을 확인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후리하타는 혹시나, 하는 기분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자신이 아카시에게 부친 편지가 이맘때쯤에 도착했을 것이었다.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해있지 않은지 아카시는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다가 후리하타와 눈이 마주쳤다. 후리하타는 급하게 발을 돌려 아파트 건물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과거에 잠시 만났던 걸 가지고 편지를 몇 년이나 보내고, 결국 찾아오는 질척질척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 뻔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몸은 마음을 따라주질 않는지, 발이 꼬여서 넘어져버렸다. 땅을 짚고 일어서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아카시였다. 후리하타는 고등학교 시절 경기의 귀퉁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도 후리하타는 아카시 앞에서 넘어졌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자신은 여전히 왜 이 모양인지 모를 노릇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후리하타가 고맙다는 인사를 웅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아카시의 얼굴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사 년이 지났지만, 그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 구석이 없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머리스타일까지도 그대로였다.

 “오랜만이야.”

 아카시가 말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의 얼굴이나 어조에 경멸의 기색이 없다는 것에 안심하며, 후리하타 역시 그에게 인사했다.

 “그러게. 오랜만이야.”

 지금 자신의 쪽팔린 상황만 제외한다면, 마치 사 년 전 가을에 처음으로 뉴욕에서 만났을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얼굴 위로 툭 떨어진 물방울에 후리하타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건가 싶어 급하게 얼굴을 닦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서 빗방울이 투두둑 연이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겨운 가을 소나기였다. 정말로 하늘은 오늘 후리하타를 작정하고 물먹이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선 내 집으로 가자. 비라도 피해야지.”

 아카시가 그를 이끌었다. 아마도 꿈이었을 기억을 붙잡아두는 대가는 너무 혹독했다.

 아카시의 집은 딱 후리하타가 생각하던 그대로였다. 그래도 같은 집에서 육 년 넘게 살았다는 경비원의 말에 미루어보았을 때, 생활감이 지나치게 없기는 했다. 후리하타는 아카시의 깔끔한 성격 덕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카시는 수건을 꺼내와 후리하타에게 건네며 들어오라고 말했지만, 후리하타는 본능적으로 지금이 이 모든 일을 끝낼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달았다. 적어도 자기가 그 날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신은 이 공간 안에 있으면 안 됐다.

 “멋대로 찾아와서 미안해. 딱히 나쁜 짓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 그냥 내가 그동안 썼던 편지를 찾아가야 할 것 같아서 찾아왔어. 편지, 혹시 봤을지도 모르지만, 음, 정말로 뭘 바라고 한 건 아니야. 아! 무슨 이상한 말 써놓았던 것도 아니야. 그냥, 단지.... 잊고 싶지 않아서 썼던 거야.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미안해.”

 간신히 말을 마친 후리하타는 고개를 들어 아카시를 마주봤다. 마지막 말은 그래도 당당하게 하고 싶었다.

 “내가 너에게 낼 수 있는 용기는 고작 이런 것뿐이지만, 그래도 진심이었어. 앞으로는 이런 일,”

 “몇 번이고 답장을 썼어.” 아카시는 답지 않게 후리하타의 말을 끊고 말했다.

 “매일 우체통을 확인하고, 편지를 읽었어. 사 년 전 이후로 끝일 거라고 생각했어.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면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런데 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딱히 달라진 게 없더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 하루에 몇 번씩이나 곱씹었지만, 곱씹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으니까. 그저 그 날들이 꿈이 아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어.”

 그는 빠른 속도로 횡설수설 말을 쏟아냈다.

 “네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데도, 나는 너에게 용기를 내어 달라고 말하는 정도의 용기밖에 내지 못해. 그래도 괜찮다면,”

 아카시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앞으로 용기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카시는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후리하타가 고를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현실이라는 단어는 지극히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추상명사에 불과했다. 서로가 현실이 되었을 때, 비로소 후리하타 코우키와 아카시 세이쥬로는 헌신할 곳을 찾을 것이다. 정말로, 현실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그렇게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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