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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러분, 하늘 위의 강 혹은 젖이 흐른 자리라고 불렸던, 이 흐릿하고 하얀 것이 사실은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선생님이 칠판에 건 커다란 성좌도를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는 은하수의 그림을 가리키면서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뉴트가 손을 들자, 대여섯 명이 뒤따라 손을 들었습니다. 크레덴스도 손을 들려 했다가, 얼른 다시 내렸습니다. 은하수가 별들로 돼 있다는 건 잡지에서 읽었지만, 요즘은 교실에서 항상 잠이 쏟아지는 데다가 책을 읽을 시간도, 읽을 책도 없었기에 잘 대답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크레덴스가 손을 내리기 전에,

“크레덴스. 알고 있지?”

라 묻는 바람에, 크레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막상 답을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헨리가 앞자리에서 뒤돌아 보며 피식 웃자, 크레덴스는 얼굴이 시뻘개졌습니다. 선생님이 다시 말했습니다.

“커다란 망원경으로 은하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은하는 대부분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

역시 별이라고 크레덴스는 생각했지만, 이번에도 입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뉴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럼, 뉴트.”

그러자 그토록 자신있게 손을 들었던 뉴트가, 역시 머뭇거리며 일어선 채 아무 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의외라는 듯 잠시 조용히 뉴트를 보다가,

“자리에 앉으렴.”

하고는, 성좌도를 가리키며 은하수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이 희끄무레한 은하를 커다란 망원경으로 보면, 엄청나게 많은 별들이 보이지요. 그렇지, 크레덴스?”

크레덴스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느샌가 눈가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래, 나는 알아. 물론 뉴트도 알고 있어. 예전에 뉴트의 집에서 같이 읽었던 잡지에 나와 있었는걸. 그리고 뉴트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커다란 책을 가져와서 ‘은하’라는 항목을 폈고, 새까만 페이지에 흰 점과 같은 별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사진을 둘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는걸. 그걸 뉴트가 잊어버렸을 리가 없는데 대답을 하지 않은 건, 내가 요즘에 아침 저녁으로 일하느라 힘들고, 애들이랑 놀지도 못하고, 뉴트와도 말을 잘 안 하게 됐으니까, 그걸 알고서 일부러 대답을 안 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을 만큼, 자신도 뉴트도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크레덴스가 학교 문을 나설 때, 같은 반의 예닐곱 명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뉴트를 둘러싼 채 교정 구석의 벚나무 아래 모여 있었습니다. 오늘 밤 열리는 별 축제에 다같이 갈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을, 크레덴스는 말없이 지나쳤습니다. 거리에서 축제 준비를 하며 나뭇가지에 장식을 매달고, 노점을 여느라 분주한 사람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마을 세 개를 지나 활판소에 다다른 크레덴스는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쉼없이 작은 활자들을 주웠습니다. 문을 나서기 전 품삯으로 은화를 하나 받은 크레덴스는 미소지으며 꾸벅 인사를 한 뒤, 빵집에 들러 빵과 각설탕을 사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엄마, 저 왔어요.”

“그래. 오늘도 고생했다.”

“오늘은 좀 괜찮았어요?”

“그런 것 같구나.”

침대에 누운 엄마가 고개를 돌리고 작게 콜록콜록 기침을 했습니다. 크레덴스는 창문을 연 뒤 조금은 자랑스러운 듯 말했습니다.

“엄마, 오늘은 빵이랑 각설탕도 사 왔어요. 우유에 넣어 드리려고.”

“너 먼저 먹으렴. 엄마는 아직 먹고 싶지가 않아서.”

“네.”

크레덴스가 저녁을 먹는 모습을 엄마는 힘없이 미소지으며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켄타우르스 축제구나. 갈 거니?”

“네.. 그, 가도.. 괜찮아요?”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안 돼. 누구랑 같이 가?”

크레덴스는 답을 망설였습니다. 혼자 갈 거라고, 아무도 곁에 있어 주지 않을 거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엄마가 다시 한 말에 크레덴스는 부리나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뉴트랑 같이 있으면 안심이야.”

“마, 맞아요. 뉴트도 분명 같이 있을 거에요.”

“그래도 빨리 와야 해. 늦어도 2시간 안에는 오렴.”

“알았어요. 1시간 반 정도 있으면 올 거에요.”

저녁을 다 먹은 크레덴스는 정리를 하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길을 따라 늘어선 가로수의 가지마다 푸르스름한 전구들이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수많은 빛의 점들을 보면서, 마치 은하수같아,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저 언덕까지, 전망대가 있는 언덕까지 이어진 길은 은하수야. 나는 그 안을 날아가는 유성이야. 크레덴스는 시린 공기를 마시며 내리막길을 한달음에 달렸습니다.

“켄타우르스, 이슬을 내려라!”

저 멀리에서 크레덴스처럼 달음박질을 하며 외치는 꼬마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매년 켄타우르스 축제 때면 아이들이 외치곤 하는 소리였습니다. 크레덴스도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는 아이들과 섞여서 신나게 소리치며 달렸지만, 이제 와서는 먼 옛날 일인 것만 같았습니다.

강을 건너려 다리를 지날 때, 이 쪽으로 아까 학교에서 본 뉴트와 다른 아이들이 빳빳한 소매를 세운 새 셔츠를 입고서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크레덴스가 인사를 하기 전, 헨리는 이 쪽을 보고 비웃듯 말을 던졌습니다.

“언제까지 입을 거야, 그 다섯 살짜리 조끼는?”

순간 크레덴스의 가슴이 싸늘해졌습니다. 뒤이어 여럿이 킥킥 웃으며 헨리에게 말했습니다.

“딱이네, 다섯 살.”

“너무 그러지 마, 불쌍하잖아.”

“사실은 사실이잖아. 셔츠 단추 터질 것 같지 않아?”

그대로 굳은 듯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크레덴스를 보며 아이들은 깔깔댔습니다. 뉴트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애타는 표정으로 크레덴스를 보았습니다.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던 크레덴스가, 이어지는 야유를 견디지 못하고 있는 힘껏 달려나갔습니다. 안절부절못하던 뉴트가, 헨리와 아이들을 제치고 그 뒤를 따라 달렸습니다.

“크레덴스, 잠깐! 크레덴스!”

뉴트의 목소리에도 크레덴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언덕까지 쉼없이 뛰었습니다.

 

* * *

 

크레덴스는 이슬이 맺힌 수풀 사이를 헤치며 단숨에 언덕 꼭대기까지 올랐습니다. 뉴트가 저 멀리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답하지 않은 채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빛이 없어 어두컴컴한 언덕에서 보는 하늘은 숨이 막힐 듯 별로 빼곡히 차 있었습니다.

‘저 십자 모양의 별들이 백조자리일까. 별이 너무 많아서 알아볼 수가 없어. 북두칠성은 나도 금방 찾을 수 있는데, 이 안에서 알아보기란 무리인걸..’

무아지경에 빠져 별을 헤아리고 있자니 비참한 기분도 서서히 누그러들었습니다. 이따금 멀리서 들려 오는 뉴트의 목소리만이 콕콕, 가슴팍을 찔러댔지만 크레덴스는 애써 무시했습니다.

그 때, 별안간 크레덴스의 시야가 빙글, 크게 돌기 시작했습니다. 별들이 하나 둘씩 크레덴스의 위로 빛의 선을 늘어뜨리고, 시야가 새하얀 섬광에 둘러싸여 눈이 부셔와 크레덴스는 눈을 감았습니다. 이어서 어딘가에서 기묘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크레덴스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뉴트의 목소리인가. 아니야, 뉴트는 이런 목소리가 아니야. 이건...

“은하 스테이션. 은하 스테이션. 다음 역은..”

기차역 방송 소리야.

깨닫자마자 흠칫 놀라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자그마한 기차에 탄 채 창밖을 보며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파란 빌로드 천으로 감싼 의자, 수명이 다 된 작은 전구처럼 약하게 빛나는 조명, 짙은 회색으로 칠해진 벽 위에 박힌 큰 진주와 같은 버튼.. 기차를 탄 적이야 몇 번쯤 있었지만, 이런 기차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기차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습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손님이 없는 걸까, 생각하자 크레덴스는 조금 무서워졌습니다. 열심히 사람의 흔적을 찾아 곳곳을 살피자, 제일 끝자리에서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민 채 밖을 보고 있는 키가 큰 아이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깨며 등이, 아무래도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크레덴스는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어진 마음을 누를 수 없어, 잔뜩 두근거려하면서 다가갔습니다. 발소리를 들은 아이가 머리를 다시 이 쪽으로 향해 돌아보았을 때, 크레덴스는 깜짝 놀랐습니다.

뉴트가 마찬가지로 놀란 눈으로 마주보았으니까요.

둘은 잠시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크레덴스가 뉴트에게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고 묻기 전, 뉴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다른 애들은 열심히 뛰었지만 우릴 못 쫓아왔어. 헨리도.”

“쫓아왔다고? 헨리가?” “응.”

뉴트의 말을 들은 크레덴스는 이상하게도 금방 납득했습니다. 아, 그랬지, 오늘은 다같이 놀기로 약속하고 만났지. 그리고, 자신만이 뉴트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된 게 조금은 기뻤습니다.

“어디서 좀 기다리고 있을까?”

“헨리는 돌아갔어. 아버지가 마중나오셨대.”

그렇게 말하는 뉴트는 왠지 조금 얼굴빛이 창백하고, 어딘가 괴로워 보였습니다. 그러자 크레덴스도, 왠지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온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뉴트가 곧 다시 창밖을 보며 힘찬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자, 그런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아, 어쩌지. 가방을 놓고 왔네. 스케치북도 깜빡했어. 그래도 괜찮아, 곧 백조 정거장이니까. 난 백조를 보는 게 정말 좋아. 저 강 너머로 날아간대도 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는 동그란 판 모양의 지도를 꺼내 크레덴스에게 보여줬습니다. 그 안에는 하얗게 빛나는 은하수와, 그 가장자리를 따라 철도의 노선이 남쪽으로 쭉 뻗어 있었습니다. 밤처럼 새까만 그 지도 위에는 열한 개의 정거장, 샘과 숲, 수십 가지의 영롱한 색을 띤 빛들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크레덴스는 왠지 그 지도를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았습니다.

“이 지도는 어디에서 샀어? 흑요석으로 돼 있는 것 같아.”

“은하 스테이션에서 받았어. 너는 안 받았어?”

“아, 우린 은하 스테이션을 지난 거구나. 지금 우리가 있는 건 여기인가..”

“응, 어쩌면 좀 더 남쪽.”

둘은 지도를 들여다보며, ‘백조’라 적혀 있는 정거장 표시의 북쪽을 가리켰습니다. 뉴트가 그 옆을 보며 혼잣말처럼 물었습니다.

“저 강가엔 달이 떠 있는 걸까?”

그 쪽을 보자, 푸르게 빛나는 은하의 강가에 은색 갈대가 마치 밭을 이루듯 일제히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며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달 때문이 아니야. 은하라서 빛나는 거야.”

크레덴스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 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고 싶을 만큼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발을 구르고,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쏟아질 듯한 별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뉴트도 함께 얼굴을 내밀어 휘파람을 불며 은하수를 향해 고개를 들었습니다. 둘에게 파도가 넘실거리는 그 강물과, 무지개처럼 반짝이는 정거장 표지판이 한꺼번에 압도해 왔습니다. 멀리 있는 것은 조그맣게,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하지만 멀리 있는 것은 오렌지빛에 노란 빛으로 확실히, 가까운 것은 푸르스름하고 조금은 흐릿하게, 어떤 것은 삼각형, 혹은 사각형, 혹은 번개며 사슬 모양으로 늘어서서 초원을 한가득 비추고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 마주보며 밝게 웃었습니다. 뉴트가 이렇게 밝게 웃는 것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크레덴스는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찌르는 듯 아팠습니다.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채로, 가만히 다시 자리에 앉는 크레덴스를 본 뉴트도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둘 다 처음 이 기차 안에서 만났을 때처럼 어색하게 마주보고 앉아 고개를 숙였습니다. 침묵을 깬 건 뉴트의 떨리는 목소리였습니다.

“미, 미안해, 크레덴스.”

“..”

왜 사과하는 거야, 혹은 아니야, 네가 뭘 잘못했다고, 라고 말해야 할까 크레덴스는 고민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너를 멀리하는 것 같은.. 아니.. 멀리해서.. 미안해.”

뉴트의 말을 잠자코 듣는 크레덴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뭐라 말을 하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뉴트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크레덴스는 조용히 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야. 같이 있어 주고.. 있잖아. 지금.”

“크레덴스..”

“네가 나를 불러줬으니까, 그리고 함께 여기까지 와 줬으니까.. 괜찮아.”

“.. 응.”

뉴트의 목소리에도 눈물이 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크레덴스는 더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뉴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어졌습니다. 용기를 내서 천천히 시선을 앞으로 향하자, 뉴트는 슬픈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 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미소짓는 두 눈이 가슴 시리도록 예뻤습니다.

그 때, 차 안이 확 새하얀 빛으로 밝아졌습니다. 순간 눈을 꼭 감았던 둘은 다시 천천히 눈을 뜨고 빛이 비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습니다. 거기에는 금강석과 풀잎에 맺힌 이슬과 수많은 반짝이는 것들을 모은 것 같은 눈부신 은하의 강물과, 그 가운데에 푸르스름한 후광을 받으며 자리한 섬, 그리고 그 위에 마치 얼어붙은 북극의 구름으로 둘러싸인 듯한 흰 십자가가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순간 크레덴스의 머릿속에 이름이 하나 스쳐지나갔습니다.

‘북십자성.’

“할렐루야, 할렐루야.”

낯선 목소리에 놀란 둘이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샌가 기차에 탄 여행객들이 모두 십자가를 향한 채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둘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뉴트의 뺨이 마치 발갛게 익은 사과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섬과 십자가는 점점 뒤쪽으로 멀어져 갔습니다. 멍하니 사라지는 빛을 두 눈으로 좇던 크레덴스와 뉴트의 뒤통수에, 아까 들었던 기묘한 목소리가 와 부딪혔습니다.

“곧 백조 정거장, 백조 정거장에 도착합니다. 이 열차는 남십자성, 남십자성행 특급 열차입니다. 독수리 정거장, 켄타우르스 정거장에서는 정차하지 않습니다. 이번 역에서 완행 열차로 갈아타 주시기 바랍니다. 정차 시간은 20분입니다. 잊어버린 물건이 없는지 주의하시고..”

여행객 여럿이 분주히 내릴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본 둘은 곧 두 눈을 마주보았습니다.

“우리도 내려 볼까?”

“20분밖에 안 서는데?”

“잠깐만 갔다 와 보자.”

조르듯 말하며 부끄럽게 웃는 뉴트를 크레덴스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기차가 둘을 남겨둔 채 가 버릴까봐 두려웠지만, 크레덴스 역시 바깥이 궁금했기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둘은 어두컴컴한 기차 안을 조심조심 걸어가 문으로 향했습니다. 크레덴스가 발 밑의 계단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자, 뒤따라 걸어오던 뉴트가 얼른 크레덴스의 두 어깨를 받치고 끌어안았습니다. 순간 크레덴스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얼굴이 이렇게 뜨거워진 걸 뉴트가 알면 안되는데, 하고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뉴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출구를 향해 앞장섰습니다.

정거장은 둘의 동네의 작고 낡은 기차역보다도 더 작았습니다. ‘백조 정거장’이라는 작은 팻말이 은은한 주황색으로 빛나고, 출구를 나서자마자 별빛이 점점이 반짝이는 강물이 둘 앞에 펼쳐졌습니다. 강 건너편을 향해 마치 징검다리처럼 판판한 돌들이 놓여 있었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 강물의 반사광을 받아 마치 원래부터 은색의 깃털을 지닌 듯 빛나는 백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건너가 보자.”

“응.”

이번에는 뉴트가 먼저 깡총, 첫 번째 돌을 향해 뛰었습니다. 크레덴스 역시 뒤따라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건넜습니다. 네 개째의 돌을 밟았을 때, 뉴트의 발이 그만 미끄러졌습니다. 중심을 잃은 뉴트의 손을 크레덴스가 재빨리 잡자, 뉴트는 금방 다시 페이스를 되찾고 똑바로 섰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선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뉴.. 뉴트?”

“응? 아, 그, 그래. 마저 가자.”

그제야 뉴트의 손을 아직 꽉 잡고 있다는 걸 깨달은 크레덴스가 얼굴이 발개져 손을 놓으려 하자, 이번에는 뉴트가 크레덴스의 손을 맞잡았습니다. 크레덴스의 두 뺨이 아까보다도 더 뜨거워졌습니다. 둘은 묵묵히 손을 잡은 채로 징검다리를 마저 건넜습니다.

이윽고 반대쪽 강가에 다다른 둘은, 나무가 늘어서 있는 작은 공원 같은 곳에 들어섰습니다. 먼저 내린 여행객들이 일제히 줄을 선 모습이 보였습니다. 쌍안경을 눈에 댄 채 한 쪽 방향을 향해 선 그들을 보자 크레덴스도 뉴트도 호기심에 사로잡혀, 제일 가까이 있는 한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실례합니다. 여기는 뭐하는 곳인가요?”

“응? 어린애 둘이서 여길 다니다니.. 공원이지 뭐, 보다시피.”

“아니, 그.. 다들 한 군데를 보고 계시니까요.”

“아, 우린 버드 워칭을 하는 중이야. 저 멀리에 백조들이 보이지? 인간과 가까이 있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징검다리나 강가 근처로는 오지 않아. 그래도 여기서 이렇게 쌍안경으로 보면 제일 제대로 관찰할 수 있지. 너희도 볼래?”

둘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청년은 자신 몫의 쌍안경을 선뜻 건네 주었습니다. 뉴트가 얼떨결에 받아들어 눈 앞에 가져다 대자, 은빛으로 온몸을 감싼 백조들이 바로 코앞에 바짝 다가온 것만 같이 생생하게 보였습니다. 뉴트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대단해, 멀리서 볼 때와는 비교가 안 돼! 여길 오길 정말 잘했어.. 크레덴스, 너도 한 번 봐!”

잔뜩 흥분해서는 쌍안경을 건네는 뉴트에게서 역시 얼떨결에 받아든 크레덴스 또한, 시야를 가득 메운 백조 무리의 향연에 입을 떡 벌렸습니다.

“.. 왜 이렇게 많은 분들이 버드 워칭을 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그렇지?”

청년이 씩 웃음과 동시에, 기차의 기적 소리가 작게 들려왔습니다. 뉴트가 다급한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말했습니다.

“이런, 너무 오래 있었나. 빨리 돌아가야 해.”

“벌써 가니? 다음 차를 타도 되는데. 우리는 다 다음 차를 탈 예정이야.”

“다음 차는 언젠데요?”

“음..”

청년이 곤혹스러운 듯 주저했습니다. 둘은 이대로 기다려도 될까 불안해하며 그의 답을 기다렸습니다.

“새로운 관측 가능한 별자리가 지평선 위에 나타날 때.”

“그게 대체 언제..”

어안이 벙벙한 크레덴스의 팔을 뉴트가 강하게 잡아챘습니다.

“얼른 가자, 크레덴스.”

“으, 응.”

뉴트가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걸까, 왜 조금은 화가 난 것만 같은 걸까 생각하며 크레덴스는 뉴트의 빠른 걸음에 겨우 보조를 맞춰 걸었습니다.

 

* * *

 

다행히 기차는 아직 플랫폼에 정차중이었습니다. 몇몇 여행객들이 하나둘씩 계단을 올라 기차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크레덴스 역시 기차에 오르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은 듯한..

“왜 아무도 차표를 검사하지 않지?”

뉴트가 크레덴스의 의문을 명확히 밝혀 주었습니다. 크레덴스는 깨달음을 얻어 두 눈을 크게 뜬 채 맞장구를 쳤습니다.

“마, 맞아. 타고 있을 때도 검표원을 본 적이 없어.”

“아무나 무료로 타도 되는 열차인 걸까?”

“그럴 리가..”

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뉴트가 곧 다시 지도를 꺼냈고, 크레덴스 역시 동그란 원반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다음은 어디지?”

“어디 보자.. 독수리 정거장?”

그 때, 제복을 입고 큰 모자를 눌러쓴 차장이 둘에게 다가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둠 속이어서인지, 제복이 너무 커서인지, 혹은 모자를 너무 깊이 눌러써서인지, 차장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표 검사하겠습니다.”

둘은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았습니다. 역시 검사하는구나. 그런데 어떻게 하지? 너 표 있어? 모르겠는데.. 눈빛으로 다급히 대화를 주고받다가, 뉴트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순간 뉴트의 표정이 변하더니, 종이를 한 장 꺼냈습니다. 작은 잿빛 차표였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차장을 곁눈질하며, 크레덴스 역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넣은 기억이 없는 큰 종이가 접힌 채 들어 있었습니다.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꺼내고는 펴 보자, 손바닥 두 개만한 초록색 종이였습니다. 차장은 크레덴스에게서 종이를 받아들어 주의깊게 글씨를 읽다가, 짐짓 놀란 듯한 어조로 물었습니다.

“이건 3차원 공간 쪽에서 가지고 오신 건가요?”

“모.. 모르겠어요.”

크레덴스는 조금은 안심한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차장은 다시 담담한 말투를 되찾았습니다.

“좋습니다. 남십자 정거장에 도착하는 시각은 대략 3시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종이를 다시 크레덴스에게 건넸습니다. 차장의 반응에 대한 궁금함을 견디지 못하던 뉴트가 다급히 종이를 들여다보고, 크레덴스도 그제야 처음으로 종이를 제대로 보았습니다. 초록색 바탕 위에 ‘4차원 내 자유 승차권’이라 적혀 있는 것을 읽고, 둘은 다시 서로를 마주보았습니다.

“우린 4차원 안에 있는 걸까?”

“그런 것 같지? 아까 ‘3차원 공간 쪽에서’라고 했고.”

“4차원이 뭐야?”

“잘은 모르지만.. 어디든 갈 수 있는 거 아닐까. 자유 승차권이면.”

“좋겠다. 난 그냥 평범한 남십자 정거장행 차표인걸.”

“바, 바꿀까?”

“장난이야.”

일부러 부러운 말투로 말하자 바로 쩔쩔매는 크레덴스를 보고 뉴트는 쿡 웃었습니다.

기차 안에 밝은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둘은 반사적으로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엄청난 빛을 내뿜는 광원이 강가에 서 있었습니다. 실눈을 뜨고 자세히 보자, 놀랍게도 빛 가운데에는 사람의 형상이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사람..인가?”

“너도 그렇게 보여?”

“응. 남자의 뒷모습같아.”

멍하니 그를 보던 뉴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목소리 톤을 바꾸었습니다.

“아, 생각났어. 나 저 사람이 왜 저기에 있는지 알아. 강 건너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1년에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하거든. 그래서 그 날을 제외하고는 항상 강 건너편을 향해 서 있는 거야.”

“둘이 만날 수 있어?”

“응, 강에서. 아버지가 설명해주셨어. 한 명은 독수리자리에, 한 명은 거문고자리에 있다고.”

크레덴스는 강 너머에 마찬가지로 이 쪽을 보고 서 있을 사람을 찾았지만, 다른 별빛들 사이에 섞여 있는지, 구분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1년에 한 번밖에 만날 수 없는 둘의 마음이 어떨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짐작은 가지 않았지만, 어딘가 슬퍼졌습니다.

곧 독수리 정거장의 팻말이 보였다가, 쏜살같이 사라져 갔습니다. 뉴트가 다시 지도를 꺼내고, 둘은 다시 지도 위에 코를 박을 듯 들여다보았습니다.

“방금 독수리 정거장을 지나쳤지?”

“응, 다음 켄타우르스 정거장도 지나칠 거야.”

“그럼 다음에 서는 건 전갈 정거장인가..”

지도 위 전갈자리의 한가운데에서 붉게 반짝이는 빛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둘은, 문득 옆자리에서 가볍게 말다툼을 하는 남매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리시 누나, 나 아빠 보러 갈래.”

“그러니까, 아빠는 아직 바빠서 못 오신다고 했잖아. 그리고 지금 우린 엄마가 기다리시는 곳으로 가는 거야.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를 기다리셨겠어?”

“응, 엄마를 보는 건 좋지만.. 그래도 아빠가 보고 싶어.”

“아빠도 곧 오실 거야. 아, 저 창밖을 봐. 얼마나 예쁜 풍경이니? 이렇게 멋진 곳을 여행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야. 그렇지 않아요?”

리시라 불린 여자아이가 갑자기 이 쪽에 말을 걸어 오는 바람에 크레덴스와 뉴트는 흠칫 놀랐습니다. 어떡하지, 잔뜩 긴장한 채로 굳어 있다가 뉴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습니다.

“아, 그.. 그렇지요. 북십자성도 알타이르도 밝게 빛나고..”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도착할 때까지 얌전히 있다가, 엄마를 만나는 거야. 알았지?”

남자아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자아이는 겨우 미소를 지었지만,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크레덴스도 뉴트도 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크레덴스가 용기를 내서 물었습니다.

“저..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우리 말이야, 이만큼 큰 배를 타고 있다가, 빙산에 부딪혔어.”

“지미!”

여자아이가 얼굴이 새파래져 남자아이를 말리려 애썼지만, 지미라 불리운 아이는 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들 새로 생긴 작은 배에 탔는데, 우리는 못 타고 큰 배에 남았어. 바닷물이 엄청 차갑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까 이 기차에 타고 있었어.”

크레덴스도, 뉴트도 할 말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서로를 마주보는 눈빛에 수많은 물음과 의문과 감정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 기차는 정체가 뭘까? 설마 정말 우리가 생각한 ‘그게’ 맞을까?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소리내어 말하지는 못해도, 서로의 생각은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때 여자아이가 일부러인 듯 크고 밝은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아, 지미, 창밖을 봐! 반짝거리는 말이 달리고 있어!”

셋은 저도 모르게 덩달아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정말로, 기차에서 10m 남짓 떨어진 거리를, 윤기가 도는 털끝마다 마치 작은 별들이 달린 듯 빛을 내뿜는 말이, 기차와 속도를 맞춰 달리고 있었습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진귀한 풍경에 놀란 것도 잠시, 크레덴스와 뉴트는 뭔가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 중 하나가 말을 꺼내기 전, 남자아이가 뽐내듯 말했습니다.

“저건 말이 아니야, 켄타우르스야.”

“어, 그러네. 네 말이 맞아, 지미. 잘 아는구나.”

아이는 어느덧 아까의 대화는 까맣게 잊고 우쭐대며 씨익 웃었습니다. 일부러 틀리게 말한 걸 거야. 뉴트도 크레덴스도 생각했지만, 귀여운 남동생을 보며 미소짓는 여자아이를 보고는 함께 빙그레 웃었습니다.

“켄타우르스, 이슬을 내려라!”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외치는 모습을 보고 뉴트와 크레덴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하지만 곧, 남자아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창밖을 향해 “켄타우르스, 이슬을 내려라!” 하고 몇 번이고 외쳤습니다. 뉴트도 크레덴스도 이렇게 크게 소리내 웃으며 떠드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습니다.

켄타우르스의 무리를 기차 반대편 너머로 떠나보내고 나서야 셋은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잔뜩 신난 모습을 보였던 게 새삼스레 부끄러워져 머뭇거리던 뉴트와 크레덴스를 향해, 여자아이가 오른손을 내밀었습니다.

“아이리스라고 해요. 당신들은?”

“뉴트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크레덴스..예요. 잘 부탁..”

먼저 뉴트가, 그리고 다음으로 크레덴스가 아이리스의 악수에 응했습니다. 잡은 손이 놀랄 만큼 차가워 둘 다 흠칫 놀랐지만,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지미, 너도 인사해야지.”

“난 제임스야.”

건성으로 말하며 손을 흔드는 동생을 보는 아이리스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제대로 인사해야지, 정말.. 미안해요, 애가 아직 어려서.”

“괜찮아요.”

넷은 어느새 테이블 두 개를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혼자 여전히 창문에 코를 바짝 붙이고 매달리듯 바깥 풍경을 보는 제임스를 내버려둔 채로 아이리스가 둘에게 물었습니다.

“어디까지 가세요?”

“어..”

“남십자 정거장이요, 남십자성.”

“아, 맞아. 그래, 남십자성.”

대답을 머뭇거리던 뉴트 대신 크레덴스가 얼른 대강 답했습니다. 목적지를 정하고 가는 여행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남십자 정거장까지 갈 수 있는 표를 둘 다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아직 많이 남았네요. 우리는 다음에 내려요.”

“전갈 정거장이요?”

“네. 엄마가 아마 거기 있을 거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리스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졌습니다. 크레덴스도 집에 계신 엄마를 생각하고는 가슴 안쪽이 저리듯 아팠습니다. 엄마는 건강히 잘 있을까. 또 기침이 도지지는 않았을까. 너무 늦으면 걱정하실 텐데... 그 때, 뉴트가 조용히 크레덴스에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크레덴스, 아까 그 표 가지고 있지?”

“응? 응.”

“이 사람한테 물어 보자. 어떤 표인지.”

“어.. 응.”

의아한 표정으로 둘을 보는 아이리스에게, 크레덴스는 허겁지겁 주머니에서 표를 꺼내 펴 보여주었습니다.

“혹시 이런 기차표를 본 적 있어요?”

“네? 자, 잠시만요.”

초록색 종이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던 아이리스가, 곧 깜짝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건 어디에서 났어요? 시공을 초월해서 언제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티켓이라니!”

“뭐, 뭘 초월해요?”

“이런 불완전한 4차원의 틈새를 달리는 은하철도로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돼 있어요. 시간을 거스를 수도 없죠. 하지만 이 표를 가지고 있으면 원하는 시간, 장소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듣기만 하고 실제로 본 적은 없는데.. 대단해요, 정말.”

크레덴스는 어쩐지 쑥스러워져 고개를 숙였습니다. 뉴트의 부럽다는 듯 이 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그 때, 차장의 목소리가 오랜만에 울려퍼졌습니다.

“곧 전갈자리의 불꽃을 지납니다. 드물게 열기가 차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있으니, 승객 여러분은 창문을 닫아 주시기 바랍니다.”

“에이,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데.”

“어쩔 수 없어. 화상이라도 입으면 큰일나잖아.”

볼멘소리를 하는 제임스를 달래는 아이리스를 앞에 두고, 뉴트는 지도를 다시 꺼냈습니다.

“전갈자리의 불꽃.. 여기를 말하는 거겠지?”

“응, 정말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아.”

자그마한 원반 위에 새겨진 모양이었지만, 전갈자리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붉은 별이 반짝이는 모습은 다른 별들과 눈에 띄게 달랐습니다. 아이리스가 뭐라 말을 걸기 전, 이번에는 제임스가 두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습니다.

“우와, 이게 뭐야? 완전 신기해!”

“지도야. 은하 스테이션에서 받았어.”

미소지으며 답하는 뉴트를 제임스는 부러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 받았는데.. 나도 갖고 싶다, 이런 지도..”

“가질래?”

“정말?”

“지미! 다른 사람 물건을 달라고 하면 어떡해!”

“달라고 한 적 없다 뭐.”

“괜찮아요, 괜찮아. 어차피 금방 내릴 건데요.”

아이리스의 핀잔에 입을 삐죽 내밀었던 제임스가, 뉴트가 건네는 지도를 받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차 안의 공기가 천천히 뜨거워졌습니다. 넷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마주쳤습니다.

“지미, 창문을 닫아 줘.”

“꼭 닫아야 돼?”

“방송에서 닫으라고 했잖아.”

제임스가 못내 아쉬워하며 창문을 닫자, 곧 시야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커다란 화염이 들어왔습니다. 모두 아무 말 없이 그, 언제까지고 꺼질 줄 모르고 타기를 계속할 것만 같은 불덩어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강렬하지만, 주위를 모두 집어삼키며 태워 없애 버릴 듯한 잔혹함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엄숙하고 경건한, 깊은 곳에 슬픔이 묻혀 있으면서도 소리내어 우는 일 없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었습니다. 크레덴스는 불꽃 한 가운데에서 마치 진혼곡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빛나는 걸까.”

뉴트가 시선을 차창 너머에 고정한 채 혼잣말을 하자, 제임스가 잽싸게 받아 답했습니다.

“나 알아, 엄마가 항상 말씀하셨어. 전갈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 주신 거래.”

“기도?”

“응. 옛날에 전갈이 한 마리 살았대. 독침을 쏴서 사막의 벌레들을 잡아먹고 살다가, 족제비에게 발견돼서 도망을 쳤대. 족제비가 쉬지 않고 쫓아오니까, 점점 지쳐서 앞을 제대로 못 보고 도망을 치다가 우물에 빠졌대.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물 벽을 타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어 가면서 생각했대. 아, 난 이렇게 죽는구나. 평생 많은 생명들을 죽이면서 살아 왔다가, 이번에는 살려고 도망친 결과 죽게 되는구나. 하느님, 제 기도를 들어 주세요. 저는 이렇게 허무하게 살다 가지만, 만약 제게 ‘다음’이 있다면, 그 때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제 몸을 써 주세요. 그리고 다음 순간에, 전갈은 자기 몸이 새빨갛게 빛나는 아름다운 불꽃이 돼서 어둠을 밝히는 걸 봤대. 그 불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타오를 거라고, 엄마가 말씀하셨어.”

“그렇..구나.”

“응, 그러니까 엄마도 언젠가 그 전갈과 같이 되고 싶다고.”

“그래서 어머니가 전갈 정거장에서 기다리신다고..?”

뉴트의 물음에 남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임스의 이야기는 뉴트와 크레덴스의 머릿속에 새겨져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불꽃을 바라보자, 눈물이 왈칵 터져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둘 다 입술을 물고 울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습니다.

“곧 전갈 정거장, 전갈 정거장에 도착합니다. 이 열차는 남십자성, 남십자성행 특급 열차입니다..”

차내 방송이 나오자 둘은 얼른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어 아이리스와 제임스를 마주보았습니다.

“이제 내리시겠네요.”

“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나서 반가웠어요.”

“안녕, 다음에 봐!”

기차가 서자, 남매는 짐을 챙기고 복도 건너편으로 사라졌습니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우물쭈물하던 뉴트가, 크레덴스의 귓가에 목소리를 최대한 작게 낮춰 속삭였습니다.

“우리도 내리자.”

“으, 응? 하지만 우린..”

“계속 타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무슨 말이야?”

“어쨌든 내려 보자. 표 잘 가지고 있지?”

“응.”

크레덴스는 영문을 모르는 채 뉴트의 손을 잡고 기차에서 내렸습니다. 마지막 발걸음을 계단에서 뗀 순간, 등 뒤에서 차장이 물었습니다.

“어디 가시죠, 손님?”

“네? 아.. 자, 잠깐 구경해 보려구요. 아까 백조 정거장에서도 내렸었잖아요. 그치, 크레덴스?”

“마, 맞아요. 저 불꽃이 예뻐서..”

소스라치게 놀란 둘이 말을 더듬으며 변명하는 것을 차장은 미심쩍다는 듯 바라보았습니다.

“돌아오실 거란 보증이 필요합니다. 뭐라도 맡겨 놓으시죠. 짐이라든가 외투 같은.”

“.. 왜 그렇게까지 저희를 다시 기차에 타게 만들려 하시죠?”

대답 없는 차장의 얼굴은 계속 보이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둘은 식은땀을 흘리며 서서 차장과 마주보고 서 있었습니다. 곧 뉴트가 크레덴스의 손을 쥔 손에 꽉 힘을 주며 외쳤습니다.

“크레덴스, 뛰어!”

크레덴스는 반사적으로 뉴트와 같은 방향으로, 차장을 등지고 달렸습니다. 둘은 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고 전속력으로 뛰었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차가운 밤 공기가 두 뺨을 에이는 듯했습니다. 뉴트가 계속 앞을 향한 채 다시 소리쳤습니다.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해!”

“으, 응?”

“표 가지고 있지? 아마 우리가 탔던 기차는 원하는 곳으로 보내 주지 않을 거야. 우리 스스로 달려가는 수밖에 없어. 나랑 함께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해!”

크레덴스는 필사적으로 머릿속 기억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뉴트와 함께 가고 싶은 곳, 그런 곳이 있던가, 나는 뉴트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좋은걸. 그런데 내가 기차를 타기 전에 어디에 있었더라. 생각이 잘 나지 않아. 우선 돌아가야 할 텐데. 은하 스테이션에 오기 전으로..

순간, 마치 번개가 내리치듯 크레덴스의 머릿속에 섬광이 번뜩였습니다.

‘생각났다.’

은하 스테이션으로 들어서던 때의 광경, 수풀과 이슬과 쏟아질 듯한 별, 멀리서 부르던 뉴트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크레덴스는 가슴이 벅차올라 그만 터져 버릴 것 같았습니다.

“생각났어, 뉴트!”

“응, 거기로 가는 거야! 손 놓지 마!”

뉴트가 해 주는 말이 너무도 기뻐 크레덴스는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습니다. 둘은 언제까지고 지칠 줄 모르고 달렸습니다.

 

* * *

 

크레덴스는 눈을 번쩍 뜨고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어느새 불빛 하나 없는 풀밭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자, 기차도 정거장도 은하수의 강물도 없었습니다.

‘꿈이었나.’

눈을 뜨기 전의 기억이 빠르게 흐려져 갔습니다. 필사적으로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내려 회상을 하던 크레덴스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옆에 뉴트가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뉴, 뉴트!”

“크..레덴스?”

뉴트 역시 깜짝 놀란 것 같았습니다. 둘은 얼마간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았습니다. 필사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습니다. 왜 나는, 그리고 이 아이는 여기 누워 있었지? 눈을 뜨기 전엔 어디에 있었지? 머리를 쥐어짜던 크레덴스에게, 뉴트가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십자가.. 예뻤지.”

흠칫, 크레덴스의 몸이 모든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오래지 않아 크레덴스는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습니다.

“으, 응, 백조, 무리, 도.”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도!”

“켄타우르스도!”

“전갈자리의 불꽃도!”

둘은 가슴이 한가득 부풀어오를 것만 같이 돼서, 서로 질세라 큰 소리로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뉴트가 웃음을 터뜨렸고, 크레덴스도 이어서 웃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터져 나온 웃음을 도무지 참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크게 웃은 나머지 눈가에 눈물까지 고였습니다.

“꿈이었을까?”

“아닌 것 같아. 봐.”

크레덴스의 물음에 답하며, 뉴트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습니다. 잿빛 승차권이 손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크레덴스도 주머니에 손을 넣자, 네모 모양으로 접힌 종이가 손 끝에 잡혔습니다. 익숙한 감각이었습니다. 뉴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꺼낸 그 종이는 역시, 아까까지 가지고 있었던 표였습니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초록색 종이를 바라보며 크레덴스는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정말 신기한 기차였어.”

“응, 그리고.. 이상하고.”

“응.”

미소지으며 답한 뉴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크레덴스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습니다.

“내려가자.”

“으, 응.”

크레덴스는 뉴트의 손을 잡고 일어섰습니다. 여전히 따뜻하고 믿음직한 손이었습니다. 말없이 언덕을 걸어내려오다, 크레덴스가 용기를 내 뉴트를 불렀습니다.

“저, 저기, 뉴트!”

“응? 크레덴스.”

부드럽게 되묻는 뉴트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떨렸습니다. 혹시나, 혹시나 거절당하면 어쩌지.

“그.. 너희 집에 또 놀러가도 돼?”

뉴트가 잠시 눈을 크게 뜨고 말없이 크레덴스를 바라보았습니다. 크레덴스는 말을 더듬으며 덧붙였습니다.

“저, 전에 봤던 채, 책.. 다시 보, 보고, 싶어, 서..”

변명조로 말하며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것을 몇 번이고 참았습니다. 괜히 말했나. 뉴트는 요즘 날 멀리했었잖아. 오늘 밤 동안 전처럼, 아니 전보다 친하게 함께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걸지도...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고 있으려니 뉴트가 큰 소리로 답했습니다.

“다, 당연하지! 백과사전도 보고, 그 큰 우주 그림도 또 보자. 아빠께도 가르쳐 달라고 하자. 우리 아빠는 우주에 관해서는 뭐든지 아시니까, 그러니까..”

열심히 말을 늘어놓는 뉴트를 다소 놀란 눈으로 보던 크레덴스가, 이윽고 미소를 되찾았습니다. 서툴게 필사적으로 한 마디씩 덧붙이는 모습이 사랑스러웠습니다. 크레덴스의 미소를 보자, 뉴트는 말을 멈추고는 부끄러워 두 뺨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그리고는 곧 역시 환하게 웃으며, 크레덴스의 손을 쥔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다시.. 전처럼 같이 놀자. 크레덴스.”

“괜찮아? 헨리랑 다른 애들은..”

“괜찮아. 걔들이 어떻게 나오건 상관없어.”

그렇게 말하는 뉴트의 옆얼굴은 어딘가 굳어져 있었습니다. 크레덴스는 걱정스럽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지만, 내심 기뻤습니다. 뉴트는 이어서 고개를 조금 숙이고 부끄러운 듯 미소지었습니다.

언덕을 내려오는 내내 둘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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